한 친구의 아버지는 헤이그에서 판사로 일했는데, 점점 더 적은 것에 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된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나이와 관련해서 하는 말인지, 직업에 관련된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 생각을 어둠과 연관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적은 것에 관해 더 많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이곳과 저곳, 한순간과 다른 순간을 구분할 수 없는 어두운 심연으로의 여행, 혹은 추락을 의미하는 듯했다. 깊이는 둥글거나 적어도 원형에 가까웠고, 어둠은 단순히 어두울 뿐만 아니라, 경계가 없었다.
그녀의 미로 같은 생각 속에서 어둠은 폐허로 남은 버려진 도시였다. 새벽이 오면 땅속으로 녹아내려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폐허. 거센 폭풍우 속에서 큰 번개가 내리칠 때, 얼핏 그것을 볼 수도 있지만, 다음 섬광은 언제나 무작위로 새로운 곳에 내리치기 때문에, 스쳐 지나간 흔적을 아무리 집중해서 바라봐도 소용이 없다. 폐허는 언제나 가닿을 수 없는 곳에 있으며, 자동 초점을 맞추기에는 너무 빠르다. 버려진 어둠의 도시가 남긴 잔해는 언제나 주변부에 머무른다.
한때 사람이 머무르다 버려진 구조물들은 흔히 영화 속에서 보는, 모든 것이 급하게 방치된 것처럼 보이는 폐허와는 다르다. 중단된 식사의 흔적이 남은 접시들, 20년이 지났는데도 얇은 먼지만 쌓인 채 무작위로 물건이 흩어져 있는 상점, 시동키를 꽂아둔 채 문이 열린 채 천천히 흔들리는 자동차, 서류 가방에서 떨어져 손부채처럼 펼쳐진 백색의 종이.
그것과는 달리, 실제로 버려진 곳들은 철저히 정리가 되어 있기 마련이다. 접시는 테이블, 식기세척기, 주방 찬장에서 치워져 있다. 모든 서랍은 꼼꼼히 비워졌고, 찬장은 정리되고, 차고도 텅 비었다. 사무실의 경우에도, 책상, 냉수기, 사무실 문 옆에 달린 이름표까지도 철저히 치워져 있다. 심지어 화장실 솔마저도 없다.
사람이든 뭐든, 생명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의 흔적도 모두 지워졌다. 먼지조차 없다. 반사되는 표면이 전혀 없는 이곳에서는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 몹시 어렵다. 아무것도 이미지를 갖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이미지가 아니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거꾸로 되돌리는 것처럼, 이미지가 천천히 사라지는 것 같다.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것과는 다르다. 아마 그래서 먼지가 없는가 보다, 그녀는 생각했다. 시간이 얼어붙은 것도, 시간이 일시 정지한 것도 아니다. 아무도 “하나, 둘, 셋, 김치”나 “제자리, 준비, 출발!”이라고 외쳐주는 이가 없다. 그는 이 구호를 이탈리어로, 즉 pronti, partenza, via라고 하는 것이 더 시적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어로 partenza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과 같고, via는 바람이나 리듬 체조에서 사용하는 붉은 리본 같다. 그녀는 이탈리아어의 출발과, via와 공산주의 간에 모호하지만 강력한 연관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 폐허는 무섭거나 위협적이지 않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은 생명과 시간의 완벽한 부재 속에서 무력화되었다. 그녀는 이곳이 사랑에 빠지는 장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오면 구분이 희미해진다. 점점 더 적은 것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되는 과정은 어둠 속으로, 모든 것이 구별되지 않는 방향으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밤은 그저 어두운 것이 아니라, 차이가 부재gks 상태다. 밤은 매끄럽다.
그녀는 대립에 회의적이었고, 사람들이 삶과 세계, 우주가 마치 야누스의 얼굴처럼 양쪽의 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할 때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눈도 두 개, 손도 두 개잖아. 괜히 그런 게 아니야. 이중성은 모든 것에 반영이 되어 있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지.”
그녀는 인간이 손, 발, 귀가 두 개이기 때문에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를 만들어낸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문어의 경우, 두 촉수를 들며 “한편으로는, 다른 한편으로는,” 이라고 말하는 것이 썩 용이하지 않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여섯 개의 촉수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아니면 뱀은 어떻게 양측 간의 긴장에 관해 이야기할 것인가?
동시에 그녀는 이분법에 약간의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대립을 찾아내고, 좌우를 식별하고, 그 둘 모두를 무시한 후에, 이를 통해서 세 번째 선택지를 찾아내는 것이 흥미로웠다. 엄밀히 말하면 이를 세 번째 선택지라고 말할 수 없다. 세 번째는 언제나 연결된 궤적이나 연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적 의식 경향에 따르면 둘 다음에는 반드시 셋이 오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셋이 아닌 모든 것이 그 반대라는 의미는 않지만, 분명히 표준, 척도, 공유된 일정한 형식을 도입하는 순간 포용하는 것보다 배제하는 것이 더 많아진다. 측정하거나 추정할 수 없는 것은 좋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말이다. 동등성은 안전한 구역을 확립해 주지만, 그만큼 그것은 불가역적인 변화를 철저히 배제한다. 가구를 옮기는 것만으로 집 자체를 변형시킬 수 없고, 몇 가지 물건을 버리는 것만으로 핵가족의 형태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세 번째 선택지는 무언가에 반대하거나 대안을 찾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셋째는 이미 확립된 것과 기꺼이 동조하고, “반대” 역시도 부정을 통한 정체성의 승인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관습과 연합한다. “대안”이라는 개념으로 소개되는 관계들은 결연보다는 승인을 기반으로 한다.
그녀는 잠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해 생각했다. 여러 종류의 마법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히피들과 최근에 사망 소식으로 화제가 된 찰스 맨슨 일당의 여자가 떠올랐다. 앨리스의 몸이 점점 커지고, 점점 작아지는 부분의 내용이 생각났다. 앨리스가 동시에 커지고 작아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크게-되기와 작게-되기가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 에너지가 덜 해로울 수는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자동차를 운전해야 한다는 전제를 지탱한다. 동시 크고 작아지지는 않지만 크게-되기와 작게-되기가 공존하는 앨리스일지라도, 앨리스는 여전히 앨리스다.
그녀가 셋째라고 부르는 것은 종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종합은 그녀에게 타협과 같은 말로, 두 가지를 약간씩 섞어놓은 것일 뿐, 완전히 뒤섞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리스크 분석의 출발점이다. 다소 섣부른 결론일 수 있지만, 그녀는 종합이 이미 존재하는 지식이나 정보를 재구성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확신했다. 거울을 세워놓고 뭔가를 거꾸로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이건 안정적인 양쪽에 한 발씩 단단히 디디고 서 있다가 뛰는 것과 비슷하다. 그녀가 말하는 셋째는 가운데에 서는 것이다. 가장 지지력이 약해서 뛰는 순간 바닥이 무너져 떨어져 내리는 곳. 이렇게 떨어질 때면 당신은 아래로 떨어지지만, 당신이 그리는 궤적은 위를 향하게 된다. 두 방향으로 동시에 이동하는 듯한 놀라운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어둠과 잔재, 현관 매트와 좋은 시간, 스피커와 눈사태, 지나가는 해변 등을 동시에 지나치는 것 같은 감각이다. 그녀가 말하는 셋째는 여행과 모험의 역설적인 마주침이다. 균열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 익명성을 붙잡는 것이다.
그녀는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등을 펴며 기지개를 켰다. 몸속의 산소를 전부 내쉬고, 완전히 비워진 상태를 즐겼다. 숨을 너무 오래 참았을 때 느껴지는 따끔한 공포와, 숨을 다시 가슴이 아플 정도로 깊게 들이마셨을 때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녀는 갈비뼈에 느껴지는 그 날카로운 고통을 잠시 머금고 다시 반복했다. 몇 번 되풀이하자, 그녀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에너지가 천천히 폐에서 퍼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 에너지는 그녀 몸 안에 있는 부드러운 곳들을 일깨우며 조금씩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특별히 변한 것은 없었고, 시간은 우주에서 부드럽게 흘렀다. 물체들은 서로 부딪혔고, 길들은 미세한 차이에 따라 교차하거나 교차하지 않았으며, 공기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맑게 느껴졌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녀는 누군가, 거의 확실히 어떤 직함을 가진 누군가가, 소위 유명한 동굴 신화를 언급하면서, 어둠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지로 만들 수 없다고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어둠의 이미지는,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면, 모두 똑같이 보인다는 뜻이었을 거다. 어둠은 어디서나 똑같이 보인다고 말이다. 이 생각은 그녀에게 안정감, 기쁨, 심지어는 관능적인 느낌과 함께 괴로움을 동시에 줬다.
무언가가 무질서한 것과 질서가 없는 것, 즉 질서에서 벗어난 것 간에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녀의 여행 가방은 언제나 무질서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질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녀, 혹은 누군가가 그것을 닫고 열 수 있었고, 수하물 벨트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 가방은 잊혀질 수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어둠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질서에서 해방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