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아주 이상해.” 그는 말했다. 그의 눈은 시선을 고정할 뭔가를 찾아야 하는데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뭔가 연결될 수 있는 대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대상을 찾기 위해 공간을 스캔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나머지 몸은 차분했다. 너무 차분해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 생일 파티에서 사진을 찍을 때, “하나, 둘, 셋, 김치”를 외치며 “얼음 상태”에 있는 것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오히려 폐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숨을 멈춘 것처럼 “일시 정지”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슬로우 모션과 천천히 걷는 것 사이에는 아름다운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걷는 것도 슬로우 모션이지만 거기에는 의도가 빠져 있다. 일시 정지는 얼음 상태에서 표현이 빠진 것이다. 일시 정지는 행동인 반면, 얼음은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종의 쇼인 셈이다. 행동하기는 더 부드러운 방식의 소통으로, 그 모서리가 둥글며 “어떻게 생각해?”라는 말로 문장을 마친다. 보여주기는 명확한 윤곽을 가지고 있으며, 둥근 모서리가 없고, 주장처럼 들린다. 마침표. 물음표 없음. 물음표가 있더라도, 그건 명령이나 의심에 가깝다. “네 생각은…”에 뒤따르는 물음표와 “도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뒤에 오는 물음표는 전혀 다른 것이니 말이다.
행동하기를 사람으로 친다면, 애정을 갈구하고, 남을 기쁘게 하고 싶어 하는 약간 불안한 부류의 사람일 것이다. 어렸을 때 지속적으로 무시를 당하거나 과잉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안전함을 느끼기 위해 늘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이다. 단순하게, 복잡하지 않게 펼쳐진 보여주기는 그 반대다. 강하고, 당당하며, 세상과 편안하게 어울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보여주기는 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성립하지 않는 반면에, 행동하기는 관객 없이 혼자서도 할 수 있다. 행동하기는 승인이 필요하지 않은 반면에, 보여주기는 정확히 그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보여주기를 우위에 두며 행동하기를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녀는 문득 한 친구가 그녀에게, 어쩌면 수사적으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표현뿐일까”라고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보여주기는 되돌아오는 반응에만 끊임없이 신경을 쓴다. 그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점점 더 거울 앞에 자주 선다. 아니, 우리 삶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거울로 구성되고, 정체성이 우리의 가장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반사적 표면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유일한 것이 된다. 정체성이 관계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관객을 필요로 한다. 언제나 되돌려 받는 것, 누군가 돌아봐 주는 것에 의존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 주고받는 논쟁을 정말 좋아했다. 한편으로는,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게다가. 이런 수사들의 반복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을 금방 지치게 할 것이다.
행동하기에 관객이 있을 수는 있지만, 관객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행동하기는 보여질 수 있지만 그것이 목표는 아니며, 자기의 활동이나 성취를 통해 스스로 승인을 얻는다. 이를테면, 설거지하고 주방을 정리한다고 해보자. 물론 이런 행동을 파트너, 룸메이트, 어머니를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모두 멀리 떠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정리가 끝나고 주방을 봤을 때, 뭔가 뿌듯함을 느끼거나, 적어도 그 전보다는 낫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물론 정말 아무런 대상 없이 무언가를 쓰거나 행동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일기장도 결국은 자신을 대상으로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도착지 없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이 경우에 주방이 다시 당신을 돌아보며 참 잘했다고 말해주는 것은 분명 아니다. 주방은 당신의 노력에 무심하다.
그녀는 무심함에 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리 오래전은 아니지만, 최근도 아니었다. 그는 최악은 아니었지만 지저분하게 끝난 관계 때문에 감정이 고조된 상태였다. 그에게 무심함이란 “좋을 대로”와 같은 말이었고, 이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와 같은 말이었다. 그녀는 생각이 달랐다. 왜 무심함이 이렇게 나쁜 평판을 얻게 되었는지, 그것이 언제부터 거리두기나 불참, 중요하지 않음과 동의어가 됐는지 궁금했다. 그녀에게 무심함은 대담하고 관대하며, 심지어 강인한 것이었다. 판단을 내리지 않겠다는 용기였고, 주변이나 사람, 생각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무심함은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다르다. 반대로, 무엇을 신경 쓸지 선별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조건 없이 신경 쓰는 행위다. “-결국 그 남자는 나에게 완전히 무심해졌어. 나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지.” “-알겠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네 엄마 머리를 생각해 봐. 우리 엄마 머리는 너무 엉망이라 웃지 않으려면 고개를 돌려야 해. 하지만 내 엄마고 나는 엄마가 어떤 패션을 선택하건 완벽히 무심해. 어떤 머리 모양을 하던, 그건 엄마의 선택이고 나는 엄마를 사랑하니까.” “-그건 다른 문제야.” “-물론 그렇지. 하지만 무심함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거나, 전부 다 중요하거나. 무심함은 단도가 아니라 양날 검이야.” “-제발, 비유 좀 집어쳐.” 그는 얼버무렸고, 그들은 함께 웃었다. 적어도 그녀의 기억에는 그랬다.
그녀는 주방이 단순히 무생물의 집합체 이상의 무언가라고 상상하는 게 좋았다. 주방이 주체성도, 정체성도, 인격도 아니지만,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공기나 온도, 습도를 포함해 주방을 그 주방으로 만드는 각각의 요소들이 있고, 그 요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것들은 자신이 주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설사 알더라도 그것이 아는 방식은 인간의 지식 형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인간이 이 세상을 구성하는 방식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어 익숙한 범주로 분류조차 할 수 없는 형태 말이다.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어떤 것이 이해될 수 없다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근본적인 변형을 거치지 않고는 인간의 지식 형태로 소개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지식은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만, 그만큼 세계에 무엇이 존재할 수 있는가를 필터링하는 문지기다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이 세계에 인간이 절대 접근할 수 없는 것들, 생명체들, 물질들, 현상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특권인가. 나는 돌을 바라보고, 손바닥으로 만지고, 아플 정도로 세게 발로 차고, 구멍에 집어넣고, 아니면 거의 완벽하게 무시할 수도 있지만, 그 돌이 어떻게 이 세계에, 자신의 세계에 존재하는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돌이 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느끼는 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수백만 개의 세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우려스러울 수 있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그 모든 것과 모든 현상에 행위자성이 생기는 순간, 세계는 수없이 많아진다. 그리고 여전히 그 세계들은 우주 속의 작은 돌멩이 하나에 불과하다. 내가 살고 있는, 혹은 함께 살고 있는 세계는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활동하는 세계 중 하나일 뿐이다. 평행우주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야자수, 비타민 C, 샤인펠드 시즌 3, 중형견에게 이 세계는 저마다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이 행성이 인간에 완전히 무심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지만 동시에 안도감을 준다.
종종 그녀는 돌이나 나무 조각을 주워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었다. 대신 그걸 탐구하는 건 피했다. 대신, 그녀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녀에게 침입할 수 있도록, 그녀의 안정성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것에 피부를 열어주려고 했다. 언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깨달음의 순간도 없었고, 그 나무 조각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초반에 어느 순간에는 실망하기도 했지만,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거나, 어떤 형태로든 지식이 전달되는 순간, 그 경험, 그 교환은 그녀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그 나뭇조각을 인간화하는 과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나뭇조각이나 돌이 그녀 안에서 무언가를 불러일으킨다는 생각, 그녀가 확신하는 이 생각은, 감각될 수도 없었고, 지식의 형태도 아니었으며, 계량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사물들은 그녀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낯선 방식으로 그녀를 변화시켰다. 그러면서도 둘 사이의 교환에서 어떤 형태의 친밀감이 솟아올랐다. 이 사물들은 그녀에게 어떤 작용을 일으켰다. 그 작용은 우리의 세계에 속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녀가 쥐고 있는 사물의 세계를 바꿀만한 일이었다. 모든 합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무 조각이나 돌, 혹은 그보다도 덜 사물 같은 물체를 쥐고 있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대상에 대한 무심함을 연습하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영향에 나를 내맡긴다는 것이며, 그 영향이 무엇이건, 그것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
“-공항은, 아니, 아니, 조명이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어둡지는 않았지만, 공항에 어울리지 않는 조명이었어.” 그의 눈은 세상에 대한 인식을 안정시키기 위한 기준으로 사용할 무언가를 찾았다. 그러고 난 뒤, 그는 구조, 전략, 전술을 겹겹이 쌓아 올려서 하나의 견고한 환경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내 기억이 부정확할 수도 있지만, 아니, 완전히 확신할 수 있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의심할 여지 없이 100% 확신해. 공항에서 평소에 쓰는 조명이 어떤 이유에선지 고장 나서 꺼진 것처럼 느껴졌어. 대신 무대 조명이 들어온 것 같았지. 큰 조명 말이야. 프로젝터 불빛이랄지. 옛날 록 콘서트에서 사용할 법한 그런 조명. 그런데 왜 그렇게 어둡게 켜져 있었던 건지 모르겠어. 공항 전체가, 무서운 분위기는 아니고, 황혼 같은 분위기였어. 뭔지 알겠어?”
그는 잠시 말없이 앉아,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몇 번 쓸었다. 처음에는 빠르게 움직이다가 천천히 느려지더니 손을 다리 위에 놓고는 손가락을 가만히 모았다. “-내가 일곱, 여덟 살쯤이었을 거야. 아버지가 미국으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왔어.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지. 뻔한 얘기였어. 아버지가 라스베이거스에 관해 한 얘기는 기억이 안 나는데, 카지노에는 창문이 없고 조명을 절대 바꾸지 않는다는 얘기가 기억에 남았어. 사람들이 시간을 잊고 계속해서 기계에 돈을 넣도록 말이야. 아버지가 이 부분을 언급한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아버지는 도박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어. 공항도 마찬가지야. 언제나 똑같은 조명이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수하물 찾는 홀에 창문이 있는 공항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어. 정말 작은 국내선 공항 빼고는 말이야.”
그는 황혼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그는 자기가 기억하는 것은 배낭과 관련된 것뿐이고, 조명에 관한 문제는 마음속에 억눌러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소 당황했다. 그는 보다 탐구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어쩌면 공항에서의 공간 경험과 관련이 있는 걸지도 몰라. 건축적인 의미의 공간이 아니라, 공간의 상태와 관련이 있는 거지. 결국 황혼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이고 특별히 놀라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공항은 일종의 비-공간이지.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후나 도착 층으로 나가기 전까지, 어떤 의미에서는 어디에도 없는 상태에 놓이게 돼. 환승 구역은 그 공항이 위치한 나라에 속하는 것 같으면서도 속하지 않는 곳이지. 그 어떤 곳에도 제대로 속하지 않는 법적 허구고, 때문에 그 구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또한 어느 정도 주권적인 존재가 돼.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권적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환승 구역에는 법이 없기 때문일지도 몰라.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나라 법이지? “-그 톰 행크스가 나온 영화처럼 말이지. <터미널>, 맞나?” 황혼이 찾아들면 사물의 윤곽이 흐려지고, 투과성이 높아진다. 더 이상 낮이 아니지만, 아직 밤도 아닌 상태가 된다. 황혼은 그것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며, 그 자체의 정체성은 갖지 않는다. 황혼은 어딘가에 고정될 수 없기 때문에 법이 존재할 수 없는 이행(移行)지다. 이를테면 공항의 환승 구역은 언제나 황혼이다. 조명이 어둡게 켜져 있다면, 이중 황혼인 셈이다. 황혼은 길을 잃는 시간, 혹은 비-시간이며,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무심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