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그녀는 그가 이야기를 길게 할 만큼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주의를 잃었던 것은 잠깐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은 우리 인간과 다르게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사치를 누릴 수 있다. 차 안에서 경험했던 사건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서 자신만의 풍경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구토라는 특정한 감각이 그녀의 입안에 강렬히 남았다. 지나치게 익숙하지만, 결코 잘 다룰 수 없었던 감각이었다. 인터넷에서 구토, 즉 위산이 치아를 손상한다는 글을 읽었다. 아프거나 메스꺼움을 느낄 때마다 그녀는 치아가 부서져 끝도 없이 작은 조각들이 입안에 흩어질까 봐 두려웠다. 또 어디선가는, 인체의 모든 세포는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 빠르게 교체된다고 했다. 그러나 치아는 예외였다. 성인이 되어서까지 사용하게 될 치아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두개골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했다. 치아는 태어나는 1일 차부터 존재하고 다른 신체 부분처럼 세포가 교체되지 않는다. 치아는 죽는 날까지 그대로인 것이다. 기억이 몸에 저장되는 것이라면, 그건 그 기억들이 세포가 자라나고 교체되는 것과 함께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래되거나 병든 세포들은 어디론가 운반되어 버려진다. 하지만 치아는 변하지 않는다. 기억이 저장되는 곳은 바로 치아다. 치아가 없다면 당신의 과거는 늦은 오후의 산들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당신은 길을 잃게 될 것이다.

“-모험은 그 반대야.” 그는 주장했다. 그러고는 말을 이어갔다. “-모험은 반대로 작동하지. 모험의 의미는 정체성을 유지하거나 보호하는 것에 있어. 아무리 조건이 거칠고 열악할지라도 모험가의 주된 임무는 자신의, 혹은 팀의 정체성을 공고히 유지하는 거야. 한편, 모험에는 목적지가 없어. 어디에선가, 누군가로부터 출발해서, 익숙한 영토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흩어진 미지의 장소들로 이동하는 거지. 모험은 정보의 역학에서 벗어나 여행해. 운이 좋다면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진입하지. 하지만 바로 모험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으로의 여정이기 때문에, 나, 즉 정체성이 중심이 되고, 계속해서 강화되어야 하는 거야. 여행에서 “자기”는 잃게 되지만, 자기가 어디 있는지는 알지. 모험에서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는 잃지 않아.”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었지만, 그의 여행사 직원 같은 이론 대신, 여행 그 자체에 대해 더 듣고 싶었다. 그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여행은,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진정한 여행을 하지도 않지만,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에 반해 모험은 무언가, 혹은 어딘가를 찾는 것이다. 여기서 까다로운 지점은 찾는다는 행위가 대체로, 아니, 거의 항상, 소유의 동의어라는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모험은 지배의 문제, 즉 자기 외부의 것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일이다. 반면에 여행은 자기 자신을 해체함으로써 친숙한 무언가에 의해 침투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체성이 해체되면 그 친숙한 무언가는 더 이상 친숙하지 않게 된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전반적으로 불편할 정도로 젠더적이거나, 문화적, 맥락적일지도 모른다. 모험과 여행 모두에 어떤 슬픔이 작용한다. 차라리 집에 머무르면서 아주 아주 작은 여행이나 모험을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녀는 생각했다. 모험은 없어도 살 수 있겠지만, 여행은 중요하다. 그녀는 두 개념 모두 일련의 가치, 특권, 나이, 계급, 인종과의 관련 속에서 이상한 뉘앙스를 띠게 된 것 같아 불편했다. 그녀는 여행이든, 나들이든, 여정이든, 모험이든, 그 모든 것이 디지털 사진의 등장으로 그 매력을 잃었다고 느꼈다. 즉각적인 보상이나, 경험을 매개하는 즉시성은 어딘가 정말로 건강하지 않았다. 어떤 일을 경험한 순간과 당신이 집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후 현상된 사진을 받는 순간 사이의 시간 간격은 서스펜스를 만들어냈다. 그건 여행이나 모험의 긴장감이 풀릴 때까지 숨을 참는 것과 같았다. “-너 완전 뭐랄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상해,” 그녀는 자기 머릿속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마 입술도 움직였겠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은 반동적으로 느껴졌다. 셀카봉을 들고 있다고 해서 곧바로 모험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여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인스타그램 스토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공항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휴가철도 아니고 월요일 아침도 아니었다. 파업이나 악천후 같은 이상 사태도 없었다. 단지 사람이 많을 뿐이었다. 초대형 공항은 아니지만 큰 공항이었다. 수하물 벨트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다음 수하물을 실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벨트에서 짐을 내려야 했다. 보아하니 그는 자신의 수하물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는데,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자기가 올바른 위치에서 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그는 계획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내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왜 기내 수하물만 챙기지 않았을까? 여행은 그리 길지 않았고 옷, 노트북, 그리고 평범한 잡동사니 외에는 가지고 온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가 수하물을 맡겼다는 사실은 그가 저가 항공을 타지 않았다는 것과, 아마도 다른 누군가가 항공권값을 지불했을 가능성을 나타냈다. 기내 수하물만 들고 가볍게 여행하는 것은 분명 좋은 것이었는데, 저가 항공사가 등장한 이후로 지난 몇 년 동안 그 생각은 뒤바뀐 것 같았다. 한때는 주말여행 가방 하나만 들고 여행하는 것이 세련되고 멋진 일로 여겨졌다. 모델이나 영화감독, 외교관 같은 사람들이나 누릴 수 있지, 일반 사람들, 특히 평범한 사람들은 누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일정 부분 인간이 아니었다. 몸 안에 외계인이 사는 로봇이나 괴물, 아바타여서가 아니라, 이들이야말로 1세대 포스트 휴먼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인류를 관찰했지만, 그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지위를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외부의 승인을 추구하지 않았고, 특히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 지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가장 고도화된 버전의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의 프랑스어 실력은 그리 우아하지 않았지만, 기회가 닿을 때마다 “désinvolture”라는 단어를 쓰려고 했다. 영어로는 정확히 대응하는 단어가 없고, 비슷한 의미조차 없는 단어다. 마치 고무장화를 신고도 그 어떤 아이러니나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 오만함, 과시의 필요로부터 해방되어 훌륭한 마티니를 마실 수 있는 부류의 특성을 가리킨다. 가장 귀여운 형태의 댄디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화려함의 시대는 어느 시점에서 서류 가방 하나만 들고 다니는 비즈니스 임원들로 대체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남성이었던 이들에게서 품위 있는 매력은 찾아볼 수 없었고, 상업 항공을 화려한 의상과 라이프스타일에서 엑셀 스프레드시트와 위험 평가보고서의 세계로 변모시켰다. 항공기와 그 인프라를 독식하던 비즈니스맨의 시대가 끝나고, 그 자리에 창의 계급과 신자유주의적 이동성이 침투한 것은 그 자체로는 분명 큰 재앙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 바퀴, 최근 들어서는 네 바퀴가 달린 기내 수하물이 도입된 것은 거의 죽음에 가까운 경험, 세상의 종말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늘날 여행할 여력이 되는 계층은 상류층이 아니다. 그들은 대체로 자기 항공권을 자기가 구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11월 중순쯤 에든버러에서 주말을 보내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여긴 아마추어들이다. 이들은 수하물을 체크인하는 대신 바퀴 달린 싸구려 가방으로 기내 공간 구석구석을 가득 메운다. 오늘날 수하물을 맡기는 사람들은 돈과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다.

공항은 여전히 붐볐다. 그의 배낭은 다리에 기대어 놓여 있었다. 그는 지루했고 약간 덥긴 했지만, 재킷을 벗지는 않았다. 어떻게 시작된 일인지도 모르게, 그는 일곱, 여덟 살쯤 되는 어린 아들과 어머니가 짐 찾는 것을 돕고 있었다. 그들은 수하물 벨트를 여러 차례 돌다가 결국 바닥에 내려진 짐들 앞에 서 있었다. 어머니와 아이는 불쌍하지만 비참해 보이지는 않는, 축축하게 젖은 개와 비슷했다. 그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는 유형이 아니었고, 곧 그들을 분주하게 돕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적극적이긴 했지만, 정신이 없었고, 아들이 오히려 돕겠다고 나섰다. 아이는 가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언제 짐을 쌌는지, 여행하지 않을 때는 캐리어를 집 어디에 두는지까지 설명했다. 모두 즐거웠고 곧 짐을 찾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들은 가방이 사라지거나, 없어지거나, 제 장소에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굳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그런 말은 아이의 이상주의와 어린 순수함을 불필요한 시점에 닳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도 많은 부모가 어떤 것의 용도나 재미, 잠재력에 관해 알려주기 전에, 그것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부터 설명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널 상처 주는 데에 더 관심이 많아. 신체적인 상처가 아니라면, 정신적인 상처를 주고 싶어 하지. 그도 아니라면 네 것을 빼앗거나 사기를 치려고 할 거야.” 이런 가르침을 받고 자란 사람이라면 수동적-공격성을 방어막으로 둘러싸고 살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몇 년 전, 다른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헬스장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한 남자가 배우자와 두 아이와 함께 여행하고 있었다. 아들과 딸이었고, 아들이 더 어렸다. 남자는 귀 위쪽은 삭발하고 나머지는 뒤로 매끈하게 넘긴 머리를 하고 있었고, 이 머리는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에는 실제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게 했다. 검은색 청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를 걸치고, 저렴한 검정 바이커 부츠를 신고 있었다. 발 바깥쪽에는 금속 링이 붙은 가죽 스트랩이 달렸지만, 안쪽에는 지퍼로 처리된 클래식한 모델이었다. 그의 왼쪽 팔 아랫부분, 그러니까 팔꿈치를 대고 플랭크를 할 때 바닥에 닿는 부분에는 문신이 여럿 있었다. 팔꿈치에서 손목까지 이어지는 부분에는 공격적이면서도 장식적인 필체로 “Never Forgive,” 절대 용서하지 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가여웠다. “-아빠, 여기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아, 그거 말이야.”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설명을 이어갈 것이다. 그는 남자가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용납할 수 없고,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고, 보복은 힘의 상징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해석을 할 수 없었다. “-아들, 명예가 전부야. 명예를 잃으면 엄마 눈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되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편해졌다. 저 아이들은 자라서 무엇을 하게 될까? 저 아이들이 어떻게 낯선 이의 도움을 받아 공항에서 가방을 찾는 일을 즐길 수 있을까? 그는 “절대 용서하지 말라”는 말에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 것일까 궁금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실로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야 하는 문제다. 그가 그 말을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엄청난 자기혐오와 끝없는 고통, 거대한 후회를 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최악인 것은, 아마 그 가족에게 물어봤다면, 자신들은 일반적인 기독교적 도덕에 따라 살고 있다고 답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아이와 함께 계속해서 짐을 찾았다. 어머니는 팬클럽 역할이 더 어울렸고, 심지어 아주 훌륭한 팬이었다. 그녀는 짐을 찾기 위해 전용 인스타그램 계정, 심지어는 블로그도 만들겠다고 했다. 그들은 웃었다. 모든 것이 관대하고 개방적이었다. 사방에 가방이 널려 있었다. 사람들, 가방,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 그는 몸을 돌리며 질문했다. 내 가방은 어디 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