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야기를 정말 잘했다. 가장 평범한 사건도 그의 입을 거치면 환상적인 모험담이 됐다. 이야기를 미리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재능이 있었을 뿐이다.

그는 사소한 디테일에 특별히 신경을 썼고, 갑자기 이야기의 초점을 바꾸거나 여러 시점 사이를 오가곤 했다. 사소한 일상의 경험도 곡절이 가득한 장대한 서사로 둔갑했다.

그녀는 그것이 어딘가 멜랑콜리 하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잘하는 능력을 갖춘 대가로 모든 경험이 결국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는 게 슬펐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차피 모든 기억은 우리 마음의 특수한 과정을 통해 필터링되고, 우리는 그 기억을 비교적 안정적이고, 비교적 임의적인 더 큰 서사의 역학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누구나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무언가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기억이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당신이 기억을 만들어내서 이야기하는 것일까? 우리는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억은 우리가 만들어낸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일어난 그대로 남은 기억이 아니라, 허구의 결속에 끼워 넣어진 대로 남은 기억들이다. 우리가 그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형태를 갖지 못했을 이야기들. 경험은 떠올릴 때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변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기억이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얻는 순간도 있다. 그런 순간은 극적으로, 혹은 갑자기 찌르듯이 찾아온다. 뭔가 강탈당한 듯한 느낌, 알몸으로 남겨진 느낌, 심지어는 수치심에 침범당한 것 같은 뒷맛을 남기는, 부풀어 올랐다가 푹 꺼진 수플레처럼 말이다.

여러 해가 지나고 누군가 그녀에게 말했다.

“-몰랐어? 네게 거절당할까 봐 이유를 지어낸 거야. 난 널 사랑했어.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고, 키스하고 싶었어. 한 번도 너와 함께한 적은 없었지만 내 몸은 널 갈망했어.”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에게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온몸이 분노로 떨릴 정도로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는 겉으로 표출하는 분노가 아니라 내면으로 향하는 분노였다. 한순간에 몇 년은 늙게 만드는 그런 분노. 그녀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고, 부드럽게 입 맞추고 싶었다. 그것이 여지를 주는 것처럼 해석될지라도. 그녀가 실망하고 화가 났던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눈이 멀어 있을 수 있었을까? 그녀도 상대를 원했다. 함께 하는 삶을 꿈꿨었다. 성관계의 차원이 아니라, 함께 일어나는 삶, 성숙한 두 사람이 인생을 공유하는 그런 삶. 결코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점근선 같은 사랑을 꿈꿨다. 문제는 그녀가 그 여자보다 못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의 사람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그녀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그녀를 그렇게 강렬하게 안아준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상상할 수 없는 열정으로 자신을 끌어안곤 했다. 그녀의 품에 안기는 것은 삶의 한 뼘 반경 안에 들어있으면서도 무조건적인 돌봄을 받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모든 사람을 그렇게 안아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미소 짓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때때로 그녀는 그 친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삶을 함께 나눌 누군가를 찾았을지. 그 사람을 “자기”라고 부르고 있을지.

이런 종류의 실망에서는 독특한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한 번 영혼과 공명하기 시작하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소리의 크기와 강도는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때로는 낮은 음역을 차지하기도 하고, 다른 순간에는 고음역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배경으로 물러나더라도 끊임없이 존재한다. 그 존재는 상시 머무르고, 오직 삶의 일상적인 소음들만이 그 소리를 잠시 잊게 해줄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배경음을 잊기 위해 바쁘게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생활에 참여하지 않거나 아예 지하실에 가게를 내는 등, 이 지속적인 소리 동반자를 견뎌내며 살기도 한다.

당신이 만드는 이야기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의 기억은 당신의 것이다. 내 기억은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지,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을 기억하고, 이야기는 언어로 만들어지니까. 말이나 글이 아니더라도 분명 언어의 한 형태로 만들어지니까. 기억은 뒤죽박죽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은 우연히 마주치는 방법 말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무질서한 다락방이 아니다. 우리는 기억을 정리하고, 분리하고, 자기 자신을 위한 자리를 만들기 위해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언어는 우리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지지대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언어는, 즉 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상상하고, 꿈꾸는 것은 온전히 내 것이기를 멈춘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교류의 방식이 굳어져야 하고, 형태를 가져야 하며,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언어가 공유되는 것인 이상, 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것인 이상, 그것은 관습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언어는 우리를 소통할 수 있게 해주지만 동시에 내 이야기가 정말로 나의 것이 아니게 만든다. 그것은 관습이라는 선 안에서만 나의 것이고, 관습은 공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쿠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은 더 짧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개인적이든 아니든 기억은 모름지기 몇 줄 안 되는 말로도 더 추상적이고 무형적인 방식으로 몸과 마음, 영혼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이야기가 필요한 것은 속물들뿐인가. 추상은 교양 있는 사람들, 이야기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아니, 어쩌면 추상은 이야기의 강렬함으로부터 안전거리를 두기 위해 방패처럼 쓰이는 것 아닐까?

어느 미술사학자가 유명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책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미국과 미국인들에게 추상화가 필요했던 것도 정확히 그 이유 때문이라고. 추상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회화, 조각, 음악, 춤 등을 포함한 미국의 예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의 예술은 저속하고, 서술적이며, 감상적이고, 피상적인 쓰레기라고 여겨졌고, 심지어 미국인들조차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추상의 “발명”이야말로 미국의 예술을 구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추상은 불필요한 모든 것을 제외하고 남은 무언가가 아니다. 이 세계의 본질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추상은 모든 것의 저속함을 덮어버리고 아무도 그 표면의 껍질을 벗겨보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무용에서는 그것을 추상이 아니라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렀고, 음악에서는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렀다.

추상표현주의는 베르사유 궁전의 내밀한 저녁 식사에 귀족처럼 차려입은 부랑자가 참여해 방귀를 뀌어대는 것과 같다.

기억이 외부로부터 도전을 받으면 혼란스러울 수 있다. 이를테면 부모가 갑자기 한낮에 불쑥 당신의 기억을 바로잡는다면 공룡처럼 큰 혼란이 찾아올 수 있다.

“-아니 얘야, 네 아빠는 차에서 내린 적이 없어.”

심지어 그 일이 버거킹이 아니라 피자헛에서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더 끔찍하다. 아니면 엄마와 아빠가 사랑에 빠진 곳이 패티 스미스 콘서트가 아니라 사이먼 앤드 가펑클 콘서트였다고 말하는 것. 어떤 기억은 수정되지 않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