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과연 여행이긴 했을까? 아니면 충분히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이야기하고 나니 비로소 여행이 된 걸까? 실제로 일어난 것과 그가 일어난 것으로 만든 것, 사실과 허구 사이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이다.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야 했을까? 혼자서 하는 여행은 쓰러져도 아무도 모르는 숲의 나무와 같은 것일까? 물리적 공간에서의 여행과 환상 속에서의 여행 사이에 명백한 구분이 있을까? 그는 환상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여행은 상상의 여행과는 다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 여행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물었다. 아니면 그가 실제로 한 여행과 그가 만들어낸 여행은 서로 다른 것이었을까? 지도 위 검은색 구불구불한 선이 그가 여행한 경로를 나타냈지만, 그는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다. 관습적인 기호들로 가득 찬 종이 위에 여기저기 뻗어 있는 검은 선은 그가 한 경험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모든 여행은 상상적이다. 신용카드 인출 기록으로 추적할 수 있는 물리적 여행도 그렇고, 그런 은행 기록은 남지 않지만 비슷하게 강렬한 흔적을 남기는 환상 속 여행도 마찬가지다. 물리적이건 실제적이건, 두 사람이 서로 동일한 여행을 할 수는 없다. 둘의 흔적이 유일하게 일치하는 곳은 경제 활동이 남긴 디지털 발자국이겠지만, 돈도 어차피 우리가 집단적으로 합의한 것 외에는 가치를 지니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회계사조차도 당신의 여행이 상상이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없다.

어떤 여행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이를테면, 사설 박물관에서 광고하는 우주로의 여행. ‘3D’라는 말이 붙는 모든 여행. 어느 시점에서 그는 그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런 여행에 따르는 피상성 때문인지, 수익성, 혹은 그 끔찍한 안경 때문인지 고민했다. 아마도 그 모두일 테지만, 이는 모두 질적이거나 전략적인 이유였다. 그는 더 근본적인, 구조적인 이유는 의사결정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경험들은 당신을 위해 대신 디자인된 것으로, 당신을 의사결정으로부터 해방해 준다. 여행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 그 여행을 만든 편집자들과 제작팀이다. 하지만 여행을 정의하는 것은 이동한 거리나 이용한 교통수단, 당신이 실제로 도로 위에서 길을 찾고 있었는지, 그 도로가 머릿속 허상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길을 찾는 것, 방향을 정하는 것, 결정을 내리는 것이 모두 당신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보통은 그 과정에서 지도의 도움을 받거나 현지인에게 길을 물을 수는 있지만, 결국은 본인과 동행인이 주도권을 쥐고 결정하는 것이다. 솔직히 여행 동행인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가이드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단체 패키지는 말할 것도 없다. 당신이 그 동행인과 편안할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좋은 시간을 보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끝도 없이 수다를 떨 때의 즐거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동행인으로 유일하게 허용되는 사람은 당신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사람. 당신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버리고 갈지도 모르는 사람. 다소 과장하자면, 의존은 여행의 정반대다. 의존이 있는 곳에는 권력이 있고, 더 최악으로는 복종이 있다.

이 이야기를 돌이켜 생각하다가 그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여행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말하자면 자신과 동등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홀로 손에 지도를 들고, 어쩌면 디지털 기기의 도움을 받아서, 아무도 당신이 당신임을 확인해 주지 않는 익명 상태에 놓일 때, 당신은 더는 환경과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다.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풍경의 일부가 된다는 것, 자신의 주변과 동등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여행이란 혼자서도 충분히 살 수 있고, 정체성이 부여한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져 자기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정체성, 그리고 정체성 그 자체를 승인하고 그에 충성해야 할 필요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여행자는 그저 한 인간이 된다. 인간성에서 ‘성’을 뺀 인간. 기준에 끼워 맞춰지지 않은 인간.

그는 계속해서 여행에 대한 사색을 이어갔다. 그는 (이를테면 여행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여행의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진짜 의미를 회피하거나, 다른 것으로 교체해 버리는 일이 얼마나 자기도 모르게 쉽게 벌어지는지 설명하려고 했다. 여행은 나들이도, 탐험도, 소풍도 아니다. 여행은 휴가와 비슷하지 않고, 모험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여행은 분명히 이상하고, 마법 같고, 비극적이고, 무섭고, 사각지대가 가득하고, 심지어는 모험적일 수 있지만, 모험적이라는 형용사를 모험이라는 명사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행이 갖는 모험적인 역학은 내적이지만, 모험의 역학은 외적이다. 여행은 일반적으로 목적지가 있다. 어딘가 알려진 곳에서 출발해서 정체성을 가진 무언가를 향해 여행한다. 목적지(destination). 생각해 보면 이 단어는 운명(destiny)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상당히 무거운 의미를 담은 단어다. 어쩌면 이것이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건, 평범한 사람이건, 운명은 바꿀 수 없지만, 그곳에 어떻게 도달할지는 당신에게 달린 것 아닐까. 당신이 결정하건 하지 않건, 운명은 불가피하다. 즉 당신은 목적지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그 경로는 바꿀 수 있다. 여행도 그렇다. 여행한다는 것은 정체성을 잃고 자신과 동등해짐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모든 가능 경로에 대한 자신의 행위자성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다소 과한 극적 효과를 담아 이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했다. 그녀는 그가 승리감을 느끼도록 내버려두었고, 속으로 다섯을 세고 나서 그가 다시 이어가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근데 말이야, 미지로의 여행은?” 그녀는 그것이 다소 수동공격적인 발언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 질문으로 인해 그가 궤도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점, 그가 분노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많이는 아닐지라도. 그녀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녀는 나중에 자기가 한 말을 곱씹을 때, 그의 완벽하게 굴러가는 바퀴에 막대기를 꽂는 일에서 어떤 쾌감을 느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지만, 그녀에게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나, 스피커 모드가 아닌 상태로 누군가 통화하는 것을 엿듣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갑자기 자기 생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기가 놓은 덫에서 남자가 어떻게 빠져나오든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그 발언을 한 이유는 그가 점유한 권력의 거품을 터뜨리기 위해서였을까? 정말 필요한 일이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왜냐하면 그녀의 발언은 일부 남자들이 여자가 말할 때 끼어드는 것과 그 방법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녀에게 쾌감을 주었다면, 그녀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그의 권력을 드러내는 대신 자신의 권력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마 그럴 가능성이 더 높지만, 그녀는 왜 그의 논리를 보다 신랄한 논거로 공격하지 않았는지 자문했다. 그의 논리를 무너뜨리고 그가 스스로 확신하는 무결성 속에서 기어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좋아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사디즘이나 마조히즘 어느 쪽에도 끌리지 않았다. 둘 다 그녀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방금 한 행동이 부끄러웠고, “파이트 클럽”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정말 불편한 영화였다. 그 영화와 등장인물에 동조하는 사람은 모두 멀리하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 행동에 이끌렸다. 자기 파괴 또는 자기 굴욕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임상 용어가 존재할 것이다.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종종 이런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한두 장면을 구체적으로 짜본 적도 있다. 아주 구체적이어야 했고, 그래서 절대 쉽지 않았다. 일종의 프로토타입이 될 만한 간단한 장면은 이런 것이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가서 일부러 정말로 싫어하는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다. 그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게 목적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최대한 노력해서 그 음식이 맛있다고 느끼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 대신 너무 다 먹으면 의심스러울 수 있으니 사이드 메뉴는 남기는 것이다. 혹은 반대로 정말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한 뒤에 맛이 없다고 크게 선언하는 것도 가능하다. 음식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에게 맛보게 하고, 그들에게서 문제없다고 확인까지 받는 것이다. 뭐가 문제인지 자기도 모르면서, 함께 밥을 먹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예측 불가한 예민함에 신경을 쓰게 만드는 것.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이 화장실에 가겠다고 자리를 비우면 모두 당신이 얼마나 한심한 루저이고 당신의 참을 수 없는 허영심을 견디기 어렵다고 수군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은밀하게 즐기는 것. 이런 것은 극단적인 형태의 나르시시즘일까, 아니면 전혀 아닐까? 단순한 일들, 이를테면 슈퍼 계산대에서 점원에게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현금이 부족하다고 털어놓는 것. 고른 물건 중에서 이것저것 빼달라고 부탁하는 동시에 핸드백 바닥에서 남은 동전을 찾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것. 동전을 몇 개 찾은 다음에 다시 빼는 과정을 번복하는 것. 어차피 전혀 불필요한 물건만 집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게 가장 중요한지 따지면서 말이다. 가장 붐비는 시간대에 중산층 동네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 이는 병적 형태의 즐거움일까? 줄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이(여러 명일수록 좋다) 파트너나 배우자, 아내, 남편, 이웃에게 이 “짜증 나는 사람”에 관해 얘기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는 심지어는 스스로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형태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속을 알기 위해, 혹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면도날로 자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후자는 대단히 슬프고 비극적이지만, 매우 다른 부류의 행동에 속한다. 이를테면 자전거 앞바퀴를 고정하는 나사를 느슨하게 푸는 것은 어떨까? 많이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다치게 될 만큼만 풀어 놓는 것이다. 그런 행동에는 아마 다른, 덜 복잡한 진단이 내려질 것이다. 아내와 자식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는 편이 덜 아프기 때문에 싸움을 걸려고 술집에 들어가서 잔뜩 얻어맞는 남자. 그 뒤에는 과하게 영화적인 장면들이 뒤따른다.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감정을 간절히 표현하거나 공유하고 싶지만, 그 도구를 갖지 못한 남성들이 빠지는 고도의 자기연민 아닌가.

생각의 실마리가 희미해지면서, 그녀의 머릿속에는 “길티 플레져,” 혹은 “죄책감에 내재한 쾌락” 같은 단어들이 메아리쳤다. 부끄러운 나머지 그녀는 궤도를 수정해 다시 여행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했다. 생각이 표류하기 전 마지막 머물렀던 파편은 자기 굴욕감에 관한 것이었고, 특권의 형태나 대치 현상과 관련이 있었다.

그녀는 차를 탔던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그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대시보드의 검은색 플라스틱이나 인조 소재, 불의의 사고가 발생해도 탑승자가 크게 다치지 않도록 둥글게 처리된 현대적인 자동차 내부의 곡선 형태, 그런 것들이 불쾌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불쾌했다. 자동차를 타면 무릎이 동굴 같은 그늘 속에 갇힌다. 하지를 집어삼키는 일종의 블랙홀처럼 말이다. 정말로 불편했다. 식탁에 앉으면 다리는 아무 문제가 없다. 공원의 벤치에 앉으면 다양하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다리를 놓을 수 있다. 하지만 차를 타면 다리가 있긴 있지만,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자동차가 더 컸고 모든 것이 더 수월했다. 좌석을 뒤로 밀면 다리를 꼬고 앉을 수도 있고, 벤치형 좌석은 심지어 더 좋았다. 그녀는 최근에 제조되는 신형 자동차들이 싫었다. 자기 발이 저 밑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알 수 없는 생물체나 끔찍한 현상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에 휩싸였다. 다리가 여섯 개이거나 여덟 개인, 크기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큰 송곳니를 지닌 존재 말이다. 멸종한 살인 귀뚜라미의 후손이나 패스트푸드 포장지, 곰팡이, 감자칩 봉지, 유기물이 뒤섞인 데에서 태어난 하이브리드 생명체일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