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더라? 누군가 자신에게 말해줬나? 누군가 자기 개인적인 경험을 들려줬을 수도 있지만, 그녀 주변에는 그 정도로 폭력적인 일을 직접 겪었을 만한 친구가 없었다. 친구의 친구나, 친구가 자기 부모가 겪은 일을 말한 걸지도 모른다. 어른들의 사회적 게임에서 장기 말이 되었던, 그 벤치에 앉았던 소년은 친구의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렸다. 어릴 때 통통했지만 그것 때문에 트라우마를 얻지는 않은 아름다운 남자였다. 하지만 트라우마가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각인이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비대칭적 재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 본인에게는 지나치게 강렬하고 압도적인 이미지로 재현되지만, 바깥에서 보면 존재하지 않는 여백처럼 보이니 말이다. 삶은 이러한 뒤틀린 이중성으로 가득 차 있고, 살면 살수록 보이지 않는 상처는 더 많이 쌓이게 된다. 운이 좋으면 적어도 그중 일부는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시스템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퍼진다. 우리의 정체성은 그런 상처들의 집합체이자, 그런 상처들이 한 개인 위로 겹겹이 쌓여 다른 이들 앞에 드러나는 표상이다. 그녀가 아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지키고, 심지어는 소중히 여기기도 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그 미끌미끌한 지하 생명체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세월 반지를 간직했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서는 마치 반지가 그의 연인이 된 것처럼 그려졌다. 그 생명체는 반지를 향해 거의 에로틱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상당히 불편한 숭배였다.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생물체의 목소리 톤 때문이기도 하지만, 금이라는 가장 안정적인 가치를 지닌 귀금속이 인간처럼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관점을 반대로 뒤집으면 더욱 불편해진다. 등장인물이 사물을 자신의 공주나 반려자, 혹은 자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사람 역시 똑같이 사물이나 상품으로 변할 수 있는 걸까?

자기 슬픔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상당히 무거운 일이다. 고통 외에는 삶에서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이 비자발적으로 빼앗긴 것은 살아도 괜찮다는 허락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은 너무 이르기 때문에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지라도, 행복한 척, 열정적인 척, 즐겁고 자발적인 척 연기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통이야말로 인생에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여잡고, 숭배하게 된다. 행복이 진정제로 변하는 경험은 잔인하다. 정체성은 일종의 보호막이다. 침입으로부터 방어해야 하는 보호 수단이다. 정체성을 지식, 언어, 관습에 기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정체성이 형성되는 심리적 메커니즘은 모든 정체성을 보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정체성은 내일은 또 다른 하루라는 사실을 제외한 모든 변화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그녀는 그 정신분석가 이야기가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진 것치고는 너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유명한 이야기라도 전해져 내려올 때마다 원본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말이다. 그 어릴 때 통통했던 남자가 이야기를 윤색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친구의 소행일 테다.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훌륭한 이야기로, 평범한 사람이 겪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극적인 효과나 심지어는 혐오감을 일으키기 위해 추가되고, 다듬어지고, 업그레이드된 부분은 어디일까? 임신이라는 마지막 반전은 어디가 아픈 사람이 아니고서야 생각해 내기 어렵다. 아니면 그런 전개 앞에서 주저하는 사람이 순진한 걸까? 이야기는 성에 관한 어머니의 공포를 (사실 성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남편과의 성관계에 대한 두려움이었지만)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이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정체성이라는 깨달음과 결합했다. 어머니와 아내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과정은 사회적 지위와 안정성을 부여했지만, 그와 함께 성적 쾌락, 심지어는 에로틱하거나 감각적인 욕망까지도 암묵적으로 금지했다. 이 일화를 전한 것이 그 어머니일 리 없다. 그녀가 아들이나 손자에게 전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 일종의 친해지기 차원에서 비밀로 말한 것일까? 정신분석가는, 뭐더라, 내담자 정보 보호를 지켜야 하니까 그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얘기했을 수도 없다. 다만, 의사가 그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몇 년 후 이 사건을 사례 연구로 활용해 학생들에게 가르치거나 책으로 출판했을 가능성은 있다. 결국 우리는 이 첫 번째 상담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그날의 상담을 다시 돌이켜 본 뒤, 결국 긴 정신분석 과정에 돌입하기로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추측뿐이고, 추측은 보통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를 떠올렸다. 최근에 장년층이라고 불리는 인구 범위를 넘어선 연령대에 진입한 어머니는 삶을 두려워하는 경향을 보기이기 시작했다. 더는 여행을 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 누군가 자신을 방문하는 일도 꺼렸다. 원래도 대단히 사람을 반기는 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동안은 누군가 찾아오면 즐거워하곤 했었다. 간단히 말해, 이제 완벽하게 안전하지 않은 일은 피하려고 했다. 그럴 수 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용감하게 살았고 자신에게 필요한 평온함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녀 주변에도 친구 몇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젊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활동적이고 재미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삶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결은 비슷하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 그들의 두려움은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녀의 어머니나 나이 든 사람들처럼 특정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나 활동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삶이 두려운 이유는 삶이 너무 큰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삶을 피하는 이유는 산다는 것이 살지 않는 것에 비해 언제나 더 큰 대가를, 다시 말해 더 큰 고통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이들은 과거에는 한때 멈출 수 없을 만큼 창의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겪고 난 뒤, 그들은 더 이상 고통받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했다. 물론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일 뿐, 그들은 약이나 또 다른 자극은 더 큰 해로 돌아올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영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인지 행동 치료를 무시하는 너무나 똑똑하거나 한심한 사람들이었고, 무엇을 하건, 언젠가는 또다시 벽에 부딪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도움을 받거나 치료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었다. 바퀴에 펑크가 나면, 아무리 별것 아닌 일일지라도, 자전거를 끌고 집에 걸어와야 한다. 10년 동안 탔던 자전거를 창고에 넣고, 내일 자전거 수리점에 맡겨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왠지 모르게 잊어버린다.

사람들이 말하길, 이를테면 북극 같은 곳에서 추위에 충분히 오랫동안 노출되어 체온이 일정 온도 이하로 떨어지고 뇌로 가는 혈액이 너무 차가워지면, 어떤 사람들의 경우 몸이 마지막 남은 에너지와 온기를 유지하려는 대신, 마치 홀린 듯 옷을 벗거나 황홀경에 빠지는 역전 현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옷이 사방에 널려 있고 알몸 상태로 발견된 시신들이 있었는데, 법의학을 통해서야 이곳에서 범죄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심각한 저체온증과 그로 인한 환각을 겪었음이 밝혀졌다.

영화에 나온 장면인데 왜 이 장면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누가 어떤 배역을 연기했는지도 전혀 기억에 없을까? 보통 영화 장면은 배우로 기억되지 않나? 어떤 대화나 갈등 장면을 시각적으로 떠올리고, 그 생각을 하다 보면 얼굴이 같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배우가 생각나고, 그러면 그 장면이 마음속 영화관에서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영화처럼 기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형태의 회상에 끝도 없이 영화적 필터를 덧씌우는 것은 상상력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텔레비전이 없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더 큰 꿈을 꾸지 않았을지 궁금했다. 그들은 모든 이미지를 영화관에서 접했을 테니 말이다. 소파에 늘어져 노트북을 배 위에 올려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렇다면 휴대전화로 텔레비전 시리즈를 보는 사람들의 꿈은 얼마나 작아지는 걸까.

수년 전, 그녀는 비디오 아트와 심리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 그 주제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짝사랑하던 여자가 그 강의를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파티에서 그 여자와 키스도 했는데 파티가 끝나자, 마법이 깨졌고, 이미 애저녁에 그 여자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런데 한 문장이 머리에 계속 남았다. 그 짝사랑 상대가 아니라, 강의에서 나온 말이다. 강의했던 예술가는 당연히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었는데, 강의 중간쯤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지로 꿈을 꿉니다. 모든 꿈은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그 맥락에서 무빙 이미지, 영상은 심리와 예술의 관계를 다루기에 최고의 매체라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단, “최고”부터. 언제부터 예술과 “최고”가 친밀한 관계가 된 걸까?

아주 완벽한 추론은 아니었지만, 한 가설이 떠올랐고, 그녀는 자기 만족감에 고개를 내저었다. 어머니, 아들, 젊은 남자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떤 직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정신분석과 영화, 혹은 무빙 이미지는 모두 사진기가 발명된 지 70년 후인 1890년대의 발명이다. 정신분석학과 꿈, 무의식에 관한 그들의 연구가,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 생산 방식이 등장하면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프레이밍 하게 된 과정과 어느 정도 하나의 흐름으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진 이미지의 대중화. 사람들이 이미지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1900년경부터였을까, 아니면 언제나 그렇게 꿈을 꿨을까? 12세기에 꿈은 전혀 다른 무언가로 이루어졌을 테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그들의 꿈이 우리에게 이미지로 전달이 된다면, 그건 틀림없이 35mm 필름도, 서라운드 사운드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꿈은 언제나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쇄 기술이 등장하기 이전, 문자 이전, 동굴 벽화 이전에 이미지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꿈속 이미지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로로 긴 형태의 이미지로 프레임화되는 것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극도로 괴롭게 하는 것은 그녀의 꿈이 영화에서 차용한 내러티브 기법에 완전히 잠식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날 꿈은 드라마투르기, 극적 긴장감, 리듬감 있는 (다시 말해 효율적인) 편집으로 물들어 버렸다. 그녀는 결코 자기가 밤에 떠나는 모험이 액션으로 가득 찬 슈퍼히어로물이 되거나, 끝까지 생각하는 것조차 싫은 최악의 경우, 몸집이 큰 호주 출신 여성이 등장해 골프를 좋아하는 노인들을 돌보는 요양원 코미디로 둔갑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눈을 감았을 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자체의 내러티브 방식을 따라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라인 “영화 대본 쓰기 교실”의 첫 수업을 연상시키는 스토리보드로 구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꿈을 프레임화하는 또 다른 수상한 방식은 (물론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프레임화는 언제나 보수적인 성격을 띤다) 그것을 연속적인 총체로 보는 것, 즉 꿈의 스토리라인을 개별 장면이나 참여자, 환경, 공간 구성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간주하는 생각이다. 그녀는 꿈에 시작, 중간, 끝이 있다는 생각을 경멸했고, 꿈은 불편할 정도로 불규칙하고 분열되어 있으며, 미완성이고, 그 어떤 일관성도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낸 꿈에 저항하는 것, 여행처럼 전개되는 꿈을 금지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신 풍경처럼 펼쳐지거나 설치 예술에 가까운 꿈을 지지했다.

설치 예술. 그렇다고 그녀가 꿈에서 무슨 미적 가치를 추구한 것은 아니지만, 파편, 사물, 물질, 단어 등 알 수 없는 것들을 모아서, 어떻게 그 사물들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기가 결정하는 대신 그 작업을 보는 이나 감상자에게 위임하는 방식. 그렇게 각자가 자신의 서사를 구성하고, 각자의 퍼즐을 맞추며, 그 사이사이에 개인적인 기억이나 소망, 욕망을 끼워 넣거나, 마음의 아카이브에서 이미지를 꺼내 삽입하는 설치 예술 말이다. 진심은 아니지만, 그런 꿈은 자동차 범퍼에 붙이는 스티커 같다고 생각했다. 꿈이 스스로 쓰여지고 싶었다면, 프린터를 가져왔을 것이다. 아니면 키보드를. 두벌식으로 쓰인 내 꿈. 피아노 건반은 쉽게 계단에 비유할 수 있다. 낮은음에서 높은음으로의 음계 연주는 계단을 오르는 일과 사실상 똑같다. 그녀는 자신의 꿈이 계단 같기를 바랐다. 통로가 아닌, 각각의 계단이 완벽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하나 독립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계단. 극적 전개가 없거나 아주 아주 희미하고, 모든 게 평평하게 펼쳐져 있는 꿈. 미국의 조각가 도널드 저드가 만든 상자들 같은 꿈. 겉보기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금속 상자들. 틀림없이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현학적인. 하나씩 차례대로 놓여 있으면서도 균질화되지 않고, 그렇다고 다양성 그 자체를 위한 다양성을 추구하지도 않는. 하나씩, 옆에, 나란히. 그녀에게는 그런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언제나, 영원히 마주 보고 앉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와 그녀의 파트너는 마주 보고 앉아 냉전 시대식으로 플러팅 하듯이 서로를 응시한다. 그 생각을 하자 하나씩, 옆에, 나란히가 더 좋아졌다.

그녀는 어머니와 계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던 것이 어렸을 때 통통했던 그 남자라고 확신했다. 또 다른 언젠가, 그는 그녀에게 여행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녀는 이미 앉아 있었고, 그래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