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쉬웠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것. 힘들어서가 아니라 각각의 계단이 그 전 계단과 공명하면서도 연속선을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실내건 야외건, 계단을 그 자체로는 아무런 본연의 가치를 갖지 않는 독립적인 요소들의 연속이라고 보는 것은 매력적인 생각일 수 있다.
실제로 계단은 소설보다는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에 더 가깝다. 아무리 동떨어져 있더라도 연합을 이루며, 연상 작용의 흐름 속에서 서로 나란히 떠다니다가, 끌림의 결절이나 어렴풋한 혹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에로틱한 영역을 발견하면 오랜 기대 끝에 분출하는 이야기들. 성장 소설처럼 변덕스럽게 변하며 점근적인, 진심 어린 애정을 다루는 이야기들 말이다. 이런 애정이 진심인 이유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타적으로 보면 이 모든 계단에 대한 비유가 얼마나 촌스러운가. 이런 달콤한 비유에 빗대지 않아도 될 만큼 계단은 충분히 성숙하다. 계단은 계단일 뿐, 문학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계단을 둘러싸고 지어진 도시들이 있다. 삶과 생활의 여러 층위를 연결하는, 오르내리는 계단들. 계단이 일상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환경에서 자라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변화와 방향, 어쩌면 중력에 대해서도 다른 감각을 지니게 된다. 계단이 많은 마을은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 사이에 더 투과성이 높은, 대안적인 경계를 만들어낸다. 마치 가정의 사회적 역학이 이미 거리 밖에서부터 드러나고, 공적 생활이 침실 문 앞까지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 이탈리아 남자들은 샌들을 신지 않는다고, 이것이 마치 공리인 것처럼 선언한 적이 있다. 그들은 발가락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비공식적인 금기다. 도시에 언덕이 많고 계단으로 가득하며, 공과 사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해서 그것이 더 많은 살갗을 드러내거나, 누디티(nudity)에 더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누디티와 사생활 사이에 역설적인 상관관계를 만들어냈다. 아니, 오늘날 누디티의 풍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일 뿐, 나머지 옷을 벗고 있거나 벗은 사람들은 모두 단순히 나체(naked)일 뿐이다.
계단을 천천히 오르내리는 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각 계단의 정중앙에서 약간 비켜난 곳, 몸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서로 스쳐 지나가는 위치 두 곳에 부드럽게 움푹 팬 홈이 생겨난다. 여러 개의 계단을 지나면 긴 평지가 나온다. 이는 연장된 고원일 수도 있고, 길게 늘어진 초원이거나, 기회들 사이에 놓인 대륙일 수도 있다. 이곳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일까, 아니면 우리가 방금 정복한 것들을 소화하고 받아들이는 곳일까? 이 평지는 방금 일어난 일의 유기적인 결말일까? 고전적인 탐정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열두 단계를 거쳐 도달하게 되는 미스터리의 해답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 연장된 공간은 연극에 있을 법한 사태의 격변(peripeteia)처럼, 고조되는 긴장감의 서막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계단을 오를 때의 얘기라면, 내려갈 때는 어떨까?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비극이고 도착한 평지가 카타르시스의 공간이라면, 논리적으로 봤을 때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암묵적으로 응당 희극이어야 한다. 그래서 내려가는 계단에 가까워지면 장난기 어린 미소가 지어지거나,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와 무심코 입술에 검지와 중지를 올리고 오므린 입술을 지그시 누르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동작은 눈에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미스테리하게도, 눈이 조금 더 크게 열리고 시야를 뒤로 밀어내는 것 같다. 많이는 아니지만, 주변의 좌표를 조금 변화시키기에는 충분한 정도.
계단에 움푹 팬 두 개의 홈은 마치 잘못 놓인 선글라스 한 쌍처럼 생겼다. 누구의 선글라스일까? 계단마다 다르지만, 거기에는 논리가 없다. 어떤 홈은 더 작고, 어떤 홈은 더 크고, 어떤 것은 돌에 금이 가 부서져 있다. 어떤 것은 반들반들하게 닦여 있고, 어떤 것들은 종잡을 수 없는 홈들 사이에서 불규칙한 질감을 유지하고 있고, 몇몇은 가장자리가 마모되거나 손상되어 보기 흉한 흉터로 남은 것도 있다.
때로는 맨발로 계단을 오르내려 보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특히 야외에 있는 계단 말이다. 각 계단의 이야기가 피부에 더 강렬하게 달라붙는 동시에, 서로 다른 표면이 주는 감각은 오가는 속삭임에 음색을 더한다.
매일매일, 어쩌면 하루에도 여러 번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그 위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은 더 깊어지고, 새로운 주름을 얻거나, 암묵지로 변한다. 애써 한 입에서 다른 입으로 전달하지 않아도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신발을 신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레가토의 느낌을 강조하면서 내려가는 것이다. 계단과 계단 사이는 부드럽게 전환되고, 그다음에 오는 평지는 뻔한 해결을 유보한다. 표면으로 떠오른 긴장이 장난기 가득 흐르는 물처럼 다음 계단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다.
계단은 일반적으로, 거의 언제나,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필요는 하지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 어떤 정치인도 다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도시의 계단을 새로 단장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저항하기를 좋아하는 대학생들도 계단 정비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지 않는다. 아무도, 계단을 매일 이용하는 사람들조차도, 계단을 돌보거나 중시하지 않는다.
<엑소시스트>에 등장하는 계단과 <로키>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이 오르내렸던 계단. 계단 자체가 유명해지는 일은 없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그조차도 대부분은 그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지 계단 자체 때문은 아니다. 신기하게도 환생과 열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계단에는 존중심을 갖지 않는다.
돌아서서 계단의 존재감을 제대로 느껴보라. 계단을 과도적인 것, 즉 도시의 중요한 요소들을 연결하는 접합제로 생각하지 말고, 그 자체로 자율적인 구조물로 인식하라.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주변 환경을 정의할 힘을 가진 존재로 말이다.
계단은 특정한 형태의 자율성을 수행한다. 능동적인 형태의 자율성. 독립성이 아닌 자율성. 전통적인 자율성이나, 일상에서의 자율성은 반동적이다. 예를 들어 한 국가가 자율적이라는 것은 이웃 국가와 구별되는 존재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이웃 국가와 상종도 하기 싫다는 의미의 자율성이다. 양측 또는 다수의 합의에 기반한 자율성이다. 계단은 그 반대의 의미에서, 능동적인 의미에서 자율적이다.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가치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거나 다른 이가 그로 이익을 얻을 수 없는 형태의 가치라는 점에서, 계단은 자율적이다. 가치로 인식되지만, 교환 가치가 없으므로 제삼자에게는 무의미한 가치다. 계단의 가치는 이렇듯 양면적이다. 즉,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거나, 오직 계단 그 자체에만 의미 있는 가치를 지닌다. 계단이 오직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닐 때, 계단은 방어적 의미의 자율성이 아닌, 무조건적인 열림의 자율성을 배태한다. 규제가 없는 자율성,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율성, 무엇보다도 계단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이 세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자율성.
계단을 천천히 오르내려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저 다른 경험일 뿐이다. 계단이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있거나, 인간이 계단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 그러니까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계단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통해 계단을 이해할 수 있다면, 계단은 당신이 느리게 걷든 빠르게 걷든, 혼자 걷든 함께 걷든, 아침 일찍이든 다른 시간이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빠른 것도 좋다. 서둘러서, 두꺼운 밑창을 신고 걸어도 상관없다. 어깨에 책가방을 메고 한 칸씩 건너뛰면서 걷는 것도 최고다. 누군가 특별한 사람과 손을 잡고 걷는 것도 문제는 안 되지만, 계단에서 싸우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싸움 도중에 열기에 휩싸인 당사자 중 한 명이 미끄러지거나 넘어져서, 그 자리에 있던 무고한 행인마저도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천천히 계단을 걸어보라.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까 말이다.
계단은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 계단이 지니는 자율성은 소유의 감각과는 관련이 없다. 이를테면 테라스에서 자신의 정원을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이룬 자신, 후손에게 가치 있는 자산을 물려줄 수 있는 자신에 대해 뿌듯해하는 사람이 느끼는 자부심과는 다르다. 계단은, 인간의 언어를 빌자면, 더 선종적(zen)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현재에 존재하는 동시에 시간에서 비켜나 있다. 계단의 자율성은 연약하며 무언가를 선호하지 않는다. 계단은 방어를 실천하기는커녕 그 단어의 의미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계단은 드러나는 것에 능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아무런 태도 없이 드러나는 것, 기대하지 않고 드러나는 것. 어쩌면 이 때문에 계단이야말로 신년 전야의 불꽃놀이를 감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일지도 모른다. 계단 맨 아래도 아니고, 꼭대기도 아니고, 그저 계단 중간 어디쯤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