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혼자 기다리는 것을 선호한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기다릴 때의 고독을 두려워하고, 그 과정을 덜 힘들게 하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이상하게도, 한 사람의 사교성이나 그 사람이 얼마나 말이 많은지, 일상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인지 등의 여부는 그 사람이 어떤 기다림 방식을 선호하는가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오히려 반대가 더 끌린다고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사교적인 사람들은 종종 혼자 기다리는 것을 선호한다. 마치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축적해 둔 에너지를 기다릴 때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상상의 군중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사회적인 것이 이국적인 음악의 형태를 한 드론처럼 머무른다는 것이다. 아니면 발 안쪽, 엄지발가락이 발로 이어지는 부분으로 그랜드 피아노의 오른쪽 페달을 밟는 것처럼. 울림을 지속하는 서스페인 페달을 밟고 있지만, 그 어떤 건반도 누르지 않는 상태. 소리의 부재, 그 어떤 소리도 부재한 상태를 지속하는 것.
사회적 동물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림에 임하지만, 외향적이지 않은 성격의 사람은 기다리는 행위로부터, 심지어는 이미 기다림의 가능성을 대면한 순간부터 고통받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불필요한 질문일지 모르지만, 이 중에서 누가 더 강한지, 강하지 않은지 궁금할 수 있다. 처음에는, 꼭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더라도, 혼자 기다리는 사람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사람이 계속 기다릴 수 있는 이유는, 단지 그가 피상적으로, 표면적으로, 시간을 유예하는 역학에 진입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다림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이며, 결코 영화적이지 않다. 개들은 기다림에 능숙하다. 적어도 우리가 보기에는 말이다. 누군가와 함께 기다리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동행을 구한다. 함께 기다리는 행위는 기다림을 다른 무언가로 변형시킬 수 있다. 하지만 타협하지 않고 정확하게 했을 때, 기다림은 빛이 사라지면 꽃잎을 닫는 꽃처럼, 하지만 정확히 그 반대로 자신의 꽃봉오리를 열어낼 수 있다. 함께 기다리기, 혹은 혼자 기다리지 않기(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꼭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의미는 아닐 수 있다)는 사회적 맥락을 해체하는, 일종의 취약함을 공유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마치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이 누군가에게 몸을 좀 가리라고 요청하는 것처럼 말이다. 함께함 없이 함께하기. 여기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공통점이 되는 순간. 기다리는 이들 간에 공통점이 많더라도, 그것을 자세히 파헤치지 않는 것. 서로의 공통점을 내버려두는 것. 공통점 없이 함께 기다리는 것은 무언가를 공유할 기회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공유하다”라는 표현이나 “드러내다”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공유한단 말인가? 더욱이 이런 형태의 공유는 음식을 나눠 먹거나 무언가를 거래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공유는 가치로부터 독립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교환의 형태다. 따라서 기다림은 공유될 수 없다. 기다림은 가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매기지 않고 가치를 경험하는 것이다. 기다림은 표현, 주문, 요구가 존재하지 않는 풍경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드러내다”는 더 문제적인 표현이다. 기다림은 전시하거나 보여주는 문제가 아니다. 연극에서 기다림이 불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관객은 기다릴 수 있지만, 배우나 퍼포머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들은 무대 위에서 언제나 뭔가를 보여주는 중이다. 기다림을 전시하는 것은 기다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흥미롭게도, 아마 이로 인해 춤, 진짜 춤, 즉 극적인 줄거리, 드라마, 등장인물, 위장 등이 없는 춤이 기다림의 연습이 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무대 위 무용수들이 관객들에게 이건 기다림이 아니라고 애써 설득할 때 더욱 그렇다.
혼자 기다리지 않는 것, 공통점, 공통 분모 없이 함께 기다리는 것은 평행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더 잘 감각될 수 있다. 그것은 같은 의자에 앉는 것도, 마주 보고 앉는 것도 아니다. 평행하다는 것은 나란히 앉는 것이다. 평행의 유일한 문제는 그것이 정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고 그로 인해 평행에는 친밀감이 없다. 공통 분모 없이 기다리는 것은 진화하지만 결코 합일로 이어지지 않는 친밀감이다. 원근법으로 구축된 세계관을 뒤로 하고, 지평선으로 향하는 점근적 여정이다. 실제로 지평선은 어느(a) 지평선도, 그(the) 지평선도, 복수의 지평선도 아니고, 그 모두다. 수평선은 여러 개의 합도, 수량도, 완전한 원도 아니다. 수평선은 기다리는 동안 듣는 것이다.
두 개의 물체, 어쩌면 두 인간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는 생각. 표면의 아우라가 뒤섞일 정도로, 서로 닿지는 않지만, 두 몸의 리듬이 공명하기 시작할 정도로 가까워진다는 생각. 감염은 다른 문제다. 감염이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권력과 결합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공명은 권력과의 결탁이 아닌 권력과 연관된 수다 떨기에 더 가깝다. 감염은 선형적인 반면, 공명은 분산적이고 그 끝을 볼 수 없다. 학급 전체가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일주일 동안 수업에 출석한 학생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감염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 여러 개체에서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것은 동질화하는, 예외를 두지 않는 힘이다. 반면에 강도는 공명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명확한 방향 없이 퍼져 나가고, 그것에 영향을 받은 몸은 고유의 역학과 물성에 따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명한다. 강도는 본래의 출발점을 잊지 않으면서도 이질적이고 다면적이다. 감염이 침습적이고 대상을 장악한다면, 공명은 기존에 있는 것과 교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지나 포옹에 더 가깝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것을 원치 않을 수도 있다. 점점 더 가까워지지만, 결코 하나가 되지 않는 것. 승인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주는 것. 점근성은 계속해서 서로 가까워지지만, 무한히 멀어져도 만나지 않는 두 선을 가리키는 수학적 용어다. 하나로의 합체가 끝없이 미뤄지는 과정. 어쩌면 별자리 중에서는 서로 평행한 것, 서로 감염시키는 것, 서로 공명하는 것, 그리고 서로 점근적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