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초반에는 기다림이 길다. 모든 형태의 기다림이 그렇다. 기다림은 모든 가능한 즐거움이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바로 그게 문제일까? 부재를 뺄셈의 형태로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게다가 좋은 것들에 국한된 뺄셈이며, 다른 안 좋은 것들, 이를테면 쓰레기를 버리는 일,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일, 아니면 더 단순하게는 그저 흐린 날 같은 것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기다림은 무언가가 지워졌다는 것, 방향성의 공백을 의미한다. 관찰력이 좋은 사람은 여기서 지워진 것은 필연성(necessity)이며 이 흐리게 지워진 것이 다시 선명한 선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필연성은 작은 병정이다. 아침에 온라인 신문을 읽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고 군대를 떠올려야 한다니 얼마나 끔찍한가. 필연성의 연대가 정렬해서 후퇴할 생각을 전혀 갖지 않고 꾸준히 전진하다가 결국 너무 늦어버려 피해가 발생한 상황. 모든 필연은 그 자체로 힘을 갖지만, 군대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각각의 필연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필연성은 지휘 체계에 입각한 명령만 따르며, 이미 확립된 지휘 체계에 복종한다. 필연성을 주장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라.
생각해 보니 한두 가지 예외가 있다. 아니, 형태는 다르지만, 그 둘은 하나일 수도 있다. 아주 드물게 나타나며, 회피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필연성이다. 너무나도 이례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많은 경우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에 한 걸음 물러서 버린다. 이는 군대에서 탈영한, 군복을 벗어버린 형태의 필연성이다. 필연성의 군대가 너무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수 세기에 걸쳐 전술, 피드백, 기술, 그리고 그중 최악은 명예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키웠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필연성은 비타협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절대 그렇지 않다. 필연성, 필요성은 언제나 어떤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너무 추우므로 필연적으로 필요하다거나, 기름값이 오르지 않았다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등. 뭔가 범죄적이거나 수치스럽거나 비윤리적인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분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외부의 무언가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필연성이다. 파트너, 공범, 혹은 그 방향성을 승인해 줄 대상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약한 필연성이다. 필요한 추진력을 얻기 위한 수단,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용기로서의 필연성. 이례적인 형태의 필연성은 다르다. 그것은 그 자체의 성취 외에는 다른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이 경우, 필연성의 실현은 그 종말을 가져오는 경우도 많으며, 나중에 돌이켜 보면 그 일이 터무니없게 여겨지거나 거기서 필연적인 부분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걔랑 만나려고 공부를 포기했다니,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때 너는 생각하는 일 빼고는 다 했지.” “알아, 그런데 왜 나한테 말 안 해줬어? 버스에 날 제발 좀 치고 가달라고 비는 꼴이었잖아.” “우린 말했어. 백만 번도 더 말했는데, 네가 사라져 버렸잖아.” “너희는…” “그리고 너는 백만 번도 더 대답했지. 너는 본능을 따르겠다고. 너무 서두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건 운명이라고. 그냥 필연적인 일이라고.” 이런 형태의 필연성은 도구적이지 않고 어떤 목적에 봉사하지 않는다. 자립적이며 다른 지지구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 무엇과도 동맹을 맺지 않으며 그 발현에는 경계가 없다. 전술, 전략, 품위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 끝까지 자신에게 충실하지만, 아무런 속내 없이 배신을 하기도 하고, 지극히 근시안적이다. 보편적인 필연성이 내일을 위해 조금씩 아껴두고 남겨두는 것이라면, 이러한 형태의 필연성은 뱀이 식사 예절 따위는 지키지 않고 먹이를 한입에 삼키는 것처럼 먹어 치운다. 무엇보다 이러한 필연성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기다림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례적인 필연성과 꼭 마주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일찍 도착하는 것처럼 말이다. 온도풍이 고도를 얻어 초월로 나아가는 것처럼, 기다림은 결국 이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얻는 것과 같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기다리는 것. 무언가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그냥 기다림. 그저 그런 프랑스 오케스트라가 70년대에 지어진 브루탈리스트 건축의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20세기 초 교향곡의 마지막 음이 끝나기를 기다린다거나, 무언가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그냥 기다림. 항공편을 환승하려고 전자기기 가게와 막스 마라 가게 사이에 놓인 맥도날드에서 이미 다섯 시간을 기다렸는데 더 연착된 탑승 시간을 기다릴 때. 보수적인 발언일지도 모르지만, 환승 구역에 있는 이 미국산 햄버거 가게는 기다림과 연관된 모든 우아함을 망쳐 버린다. 비행기 여행에 따르는 부수적인 가치는 정확히 시간의 안과 밖에 동시에 머무는 느낌, 비-시간에 유예된 상태로 두꺼운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며 시간이 평범한 화요일처럼 흐르는 것을 바라보는 것 아니었던가? 그래서 공항 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모든 곳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아닌가? 공항에서 찍은 사진을 나중에 보면 언제나 실망스럽기 마련인 것처럼 말이다.
그냥 기다리는 것. 그냥 기다린다는 것은 쉽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반대다. 이른바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은 엄격하게 하지 않는 이상 다른 것, 이를테면 특정한 활동이나 무엇인가에 대한 추구로 변하기에 십상이다. 그냥 기다리는 것을 명상으로 오해해서도, 그렇게 실천해서도 안 된다. 그냥 기다리는 것은 영적 깨달음이나 개인의 퍼포먼스를 최적화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게으름이나 무기력함과도 전혀 관계가 없다. 그냥 기다림의 조건은 연결됨과 흩어짐 사이의 긴장이다. 극도로 공적인 환경에서 지극히 사적인 느낌이다.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보자. 단, 그 어떤 라운지도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라운지의 존재는 이 경험에 필수적이지만, 오직 시간을 흘려보내는 가운데 배경으로 존재할 때만이다. 라운지는 무선 헤드폰을 사용함으로써 단절감을 느끼고, 파워포인트 발표에 중독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공항은, 특히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나와서의 구역은, 패스트푸드와 눅눅하게 데워진 치아바타 샌드위치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에 있어서 탁월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기다림은 냉동실에 보관된 보드카처럼 만질 수 있는 것, 준 액체에 가까운 것이 된다.
가역성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무관심한 관심은 관심 있는 무관심함과는 다른 것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기다리는 것, 그냥 기다리는 것은, 욕구와 식욕과 관계없이 느끼는 즐거움, 기쁨, 심지어는 만족의 형태를 내포한다.
강도(intensity)는 아직 이름을 찾지 못한 힘(force)으로, 누군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잊었고, 그래서 누구도 제대로 점유할 수 없는 힘이다. 힘은 더 간단하다. 거기에는 방향성이 있고, 이름이 있으며, 사건의 연쇄, 인과 관계 속으로 기입될 수 있다. 힘은 안정적이고, 측정할 수 있으며, 높은 개연성을 수반한다. 강도는 그런 게임을 하지 않는다. 신비로운 방식으로 움직이고, 예측할 수 있는 개연성이나 예상되는 결괏값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기다림은 강도적이다. 그에 비해 너무 많은 것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은 힘과 연관된다.
힘은 반복해서 가할 수 있으며, 그럴 때마다 거의 비슷한 결과를 불러온다. 매번 조금씩 다르지만, 크게 보면 비슷하다. 자동차 시동을 걸 때 몇 번은 안 걸릴지라도, “거의 됐어, 한 번만 더 해봐”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강도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반복될 수 없으며 긍정적인 의지를 계속 유지할 수도 없다. 강도는 힘이 세지만, 그 힘을 축적하지 않는다. 한 번 더, 보다는 써버리는 것에 더 가깝다. 강도는 특이성(singularity)의 영역을 차지한다. 특이성의 영역은 독신(single)이라 누군가와 안고 있고 싶은 것과는 다르다. 특정한 맥락 속에서 고유하다는 의미에서의 독보적인(singular)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마라도나는 축구 선수들 사이에서 아직도 독보적인 존재로 꼽힌다. 하지만 강도의 특이성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기다림은 바로 그 이야기에 속한다. 적어도 가끔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