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눈을 감았고 코로 들어오는 숨을 느꼈다. 찬 공기가 척추를 휘감으며 어깨뼈 사이의 공간을 약간 확장했고 곧이어 공기로 부풀어 오른 폐가 명치를 아래로 끌어내린 결과 배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눈을 감고 들이마신 첫 숨은 그녀에게 일시적인 자유처럼 느껴졌지만, 기도를 통해 몸으로 들어오는 두 번째 들숨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특히 오늘은 강렬한 하루였기 때문에, 고통과 고장 남, 심지어는 거절의 기분에 흠뻑 젖은 이야기들이었다.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느날 아침, 마지막으로 몸이 고통을 호소하거나 병원이 아니더라도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몇 년 전 일하던 중에 부상을 입은 후, 등 아랫부분과 골반 통증 때문에 매일 밤잠에서 깼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몇 달간 잠을 설쳤고, 꿈이 험해서 아주 얕게 쉴 수밖에 없었다. 통증을 떨쳐 버리려는 노력은 큰 도움이 안 됐다. 몇 주 만에 (당시에는 반투명이었던) 그녀의 의식 뒤로 우울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드는 것이 두려워졌다. 수면 상태로 들어가는 순간 끊임없이 그녀를 갈아대는 고통이 우울증을 초대하고, 이 손님은 머지않아 영구적으로 머무를 구멍이나 균열을 찾아낼 것 같았다. 같은 건물에서 살던 한 노인은 자기가 한평생 공사 현장에서 일했는데 온몸이 아파서 일찍 은퇴했다고 했다. 딱히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몸이 너무 마모되어서 한두 곳이 아니라 전체가 끊임없는 통증에 시달렸다. 그는 활기찬 인물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고통에 떨리는 그의 기운이 느껴졌고, 그것은 곧 그의 소멸과 존재를 정의하는 고통이었다. 두 번째로 폐에 공기를 넣었을 때는 불평불만이 한 뭉치 들어왔다. 다시 돌아가면 회복을 위해 시간을 좀 보낼 것이다. 몸의 비대칭을 받아들이고 고통 속에서 평안을 찾을 것이다. 그녀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마모된 몸의 고통 속에서 평온이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난데없이 뉴욕 맨해튼에서 길을 찾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생각났다. 도로에 번호가 붙어 있으면 길을 잃기가 상당히 어렵다. 이 빅 애플에서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는 모를 수 있지만 길을 잃을 수는 없다. 다음 거리가 더 높은 숫자이거나 더 낮은 숫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뉴요커라고 여기기까지 3일밖에 안 걸리는 걸지도 모른다. 다른 도시, 이를테면 아시아의 도시들은 반대로 작동한다. 그곳에서는 거의 언제나 길을 잃은 상태이지만, 자기가 어디 있는지는 안다. 왜냐하면 그곳은 언제나 ‘여기’니까. 그녀는 여러 번 다시 태어나야만 그 도시를 이해하고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도시에서 살아본 적이 있다. 참고로 이런 곳에서 지도는 전혀 도움이 안 됐다. 물론 그녀는 후자의 도시를 훨씬 선호했다. 삶이, 특히 거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진동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체로 두 종류의 대도시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도시들은 언제나 종말 하루 전처럼 느껴졌고,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리게 되는 임계점을 지연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았다. 이런 도시들은 과거에 매달리고, 역사에 자부심을 가졌다. 보존하는 것, 도시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어때야 하는지에 관한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런 도시들을 지배하는 것은 몽마르트르를 걸으며 정통성이나 가치, 젠트리피케이션이 얼마나 큰 해악인지 등을 이야기하는 동질화의 힘이다. 반대로 언제나 종말 다음 날처럼 삶이 흘러가는 도시들이 있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것처럼 앞으로 몸을 기울인 채 나아가는 도시들. 종말은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기다릴 게 없는 도시들. 잔해를 주워 노트르담을 재건할 것인지, 관습이나 규범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새 도시를 만들 것인지. 질서는 형편없지만 열려 있는 도시는 외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7층에는 물리치료사, 회계사, 하이엔드 헤어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있는 같은 건물 8층에 식당이 있어도 괜찮다. 그녀는 너무 여러 층위를 가진 도시들을 좋아했고, 동네에 아무런 일관성이 없지만 그래도 거리를 깔끔하게 유지할 만큼 자부심을 느끼는 도시들의 질감을 사랑했다. 질서정연하게 자연의 무질서를 유지하는 도시, 그러면서도 당연히 자연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도시. 구조적으로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보살펴야만 하는,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도시. 그녀는 초원, 풀밭, 태양, 바람과 암흑이 너무도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에 어딘가 짜증이 났다. 그건 모든 걸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녀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둘 중의 하나를 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윤리적으로 복잡한 상황 때문에 두 관계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영화에서는 언제나 밝은 쪽과 어두운 쪽이 있고, 어두운 쪽은 언제나 모두가 억압에 동의하고 숭배하는 위계적인 구조로 표상된다. 반대로 밝은 쪽은 언제나 즉석 회의 같은 곳에 행복하게 모여 서로 다인종으로 구성된 부족의 미래를 고민했다. 미래는 다중적이었고 다각적이었다. 지혜롭고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 옆에 앉고 둘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화면 바깥에서 도사리고 있는, 힘을 확장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어둠의 세력만 아니었더라면. 초원, 풀밭, 태양, 바람과 암흑은 둘 다 그녀가 언제나 길을 잃었지만 자기가 어디 있는지는 정확히 아는 장소들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었지만, 여기는 언제나 그 모든 곳이었다. 초원, 풀밭, 태양, 바람에 있을 때 그녀는 주변에 통합되었고 주변이 그녀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여기’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제 자리에 있었다. 그녀를 세계에서 분리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세계가 그녀 안에 있었다. 거기에는 지도가 없었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 같은 확장의 움직임이나 박동하는 움직임밖에 없었다. 분리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주변 환경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방향성은 흐릿해지고 모든 것이 평평해졌다. 그녀와 그녀의 주변 환경,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이 수평선과 동일한 것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녀와 그녀의 주변 환경, 그리고 수평선은 모두 시들어갔다. 암흑, 그녀의 암흑은 완전히 다른 것인 동시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서도 그녀는 환경으로 통합되고 환경이 그녀로 통합되었다. 암흑에서도 지도는 불필요했다. 암흑에서는 위계가 불가능했고, 모든 것은 공존의 상태로 떠올랐으며, 수평선은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 그녀 안의 암흑은 그녀 안에 있었지만,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런 특질을 갖지 않는 것, 정체성이 부재한 것이 어떻게 누군가나 무엇인가에 소유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암흑이었고, 그 어떤 관심도 없었으며, 완벽하게 무심했다. 암흑은 개방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개방성은 일종의 경계로, “여기까지, 더는 못 감”을 내포하는 반면, 암흑이 실천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열림이었다. 암흑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었다.